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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기

지리산이 말하고 섬진강이 쓰다 한 벌거벗은 방랑자가 산에 들어갔다. 강이 그를 보고 이렇게 썼다. ‘그가 산이 되었다.’ 그가 강에게 답한다. ‘산이 내가 될 수 없으니 내가 산이 되었다.’ 한 곳에서 1년 이상 머물지 않으며 방랑의 글쓰기를 한 4년의 기록. 방랑을 멈추면 자유가 죽는다. 저자의 말 은둔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나약함은 고립을 꿈꿀 엄두가 없었고 도피를 감행할 만큼 상처가 큰 것도 아니었다. 까닭은 딱히 짚어낼 수 없었다. 그저 가야만 했고 결국 짐을 쌌다. 이로써 바람 따라 방랑을 시작한 2009년 5월 이후 일곱 번째 낯선 걸음이다. 중간에 고향집에 잠깐씩 다녀온 것 말고는 오롯 낯선 땅만 떠도는 셈이다. 처음엔 그저 몇 달의 객기로 끝날 줄..
지리산이 말하고 섬진강이 쓰다

한 벌거벗은 방랑자가 산에 들어갔다. 강이 그를 보고 이렇게 썼다. ‘그가 산이 되었다.’ 그가 강에게 답한다. ‘산이 내가 될 수 없으니 내가 산이 되었다.’
한 곳에서 1년 이상 머물지 않으며 방랑의 글쓰기를 한 4년의 기록. 방랑을 멈추면 자유가 죽는다.

저자의 말

은둔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나약함은 고립을 꿈꿀 엄두가 없었고 도피를 감행할 만큼 상처가 큰 것도 아니었다. 까닭은 딱히 짚어낼 수 없었다. 그저 가야만 했고 결국 짐을 쌌다.
이로써 바람 따라 방랑을 시작한 2009년 5월 이후 일곱 번째 낯선 걸음이다. 중간에 고향집에 잠깐씩 다녀온 것 말고는 오롯 낯선 땅만 떠도는 셈이다.
처음엔 그저 몇 달의 객기로 끝날 줄 알았다. 독신이었던 후배(지금은 늦장가를 갔다)의 곁에 비집고 들어갈 때만 해도 지인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 잠깐의 일탈이라 여겼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 통도사가 있는 양산으로 향하고 이어 김해와 진례를 거치면서 바람보다 빠른 세월 속에 여행은 방랑이 되었다.
2010년 12월 말, 외국인 노동자들의 기숙사감 노릇으로 1년 여 밥을 먹던 진례를 떠나 마침내 일산을 향한 버스에 오를 때엔 객지생활이 조만간 끝날 것 같기도 했다. 그럴 작정은 없었지만 물결치는 운명의 너울에 쓸려 어딘가에 닿으면 주춧돌을 심을 수도 있을 듯했다. 오십 줄을 바라보는 쇠한 몸뚱이가 그리 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정착하지 못하는 수컷의 본능이 이제 맥을 다한 듯싶기도 했다.
착각이었다. 끝내 모든 것을 놓고 봇짐을 싸야만 하는 가슴에 바람소리가 거칠었다. 해갈할 수 없는 메마른 심장이 더 먼 곳, 더 깊은 곳을 향해 시선을 재촉했다. 채워야 할 헛헛한 영혼이 너무 넓었고 닿아야 할 벼랑 끝 허탈이 아직은 고팠다.
지리산은 흐렸다. 이른 봄바람은 거셌고 늦은 겨울은 골마다 으르렁거렸다. 곧이어 바람의 등짝에 올라탄 빗줄기가 빈틈 보인 땅에 살처럼 꽂혔다. 남쪽이어도 산은 드셌다. 산마루를 휘도는 구름이 도시의 안락은 가당치 않다며 비죽거렸다. 원망도, 타박도 할 수 없었다. 산은 그래야 옳았다.
젊어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떠돌이 생활은 많은 인연을 낳았다. 사는 것 자체가 인연을 만드는 과정이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지리산도 그러할 테고 여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에 담을 것들, 귀에 새길 사람들, 몸의 말초들이 먼저 알아챈 많은 인연들이 세월의 바람과 함께 다가오고 지나갈 것이다.
지리산이 종착지는 아니다. 시간은 티끌인 나를 산 밖으로 몰아낼 터이고 물과 흙에 섞여 지금과는 다른 그 무엇이 되게 만들 것이다. 알 수 없다. 깨진 질그릇이 될 수도 있고 굽어 쓸모없는 잡목이 될 지도 모른다. 각오한다. 삶의 명命이 그러하니 끝을 기약하는 것은 자만이리라. 다만, 무턱대고 헤매는 미로의 삶이라도 흔적을 남기고자 할 따름이다. 만나고 또 어느 날 헤어지더라도 인연은 늘 기억이라는 과거 속에 새겨지는 것이니, 욕심이지만 나의 볼품없는 방랑도 기억되리라 기대한다.
지리산도 그러하리라. 그 까닭에 여기, 산에 사는 동안의 허튼 상념과 가벼운 이력을 감히 활자로 남긴다.
지리산이 말하고 섬진강이 쓰다.

안근찬
 
강원도 홍천 출생
건국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건국대학원 불어불문학과 수료
소설 ‘멸의 노래’, ‘인류멸종프로젝트1,2’, ‘사후일기’
시집 ‘사랑이 유죄인 이유’
에세이 ‘굿모닝 아버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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